함정에서 페인트칠하던 해양경찰관 박 씨, 백혈병 진단
벤젠 등 노출 의심에 공무상 요양 신청했지만 불승인
인사혁신처 · 1심 재판부 “업무 연관성 직접 증명해라”
대리인 “기관자료 부재를 박 씨에 불리하게…불공평”
박 씨(54)는 2006년 해양경찰 순경으로 임용돼 수년간 함정에서 일했다. 100톤급 소형정부터 5000톤급 대형함까지 4개 함정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는 줄곧 안전 업무를 담당했다. 박 씨는 외국인 불법어선 단속, 조난 어선 예인, 인명 구조 같은 해경 본연의 업무는 물론 함정 녹 제거와 도색, 크레인, 윈드라스(닻을 감아올리는 장치) 관리까지 맡았다.
2018년 9월, 가슴 통증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만성골수성백혈병(CML) 진단을 받았다. 해양경찰청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해체됐다가 2017년 7월에야 독립 기구로 재출범했다. 박 씨의 확진은 그 재편이 일단락된 직후였다. 그는 함정 작업 중 지속적으로 다룬 페인트와 신나 속 벤젠을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해 공무상 요양을 신청했다. 하지만 인사혁신처는 박 씨가 사용한 물질 속 벤젠이 “불순물 수준”에 불과해 백혈병과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다.
[N번의 벤젠] 프로젝트
①법륜스님이 나를 살렸다

정말 불순물 수준이었을까
남부저널 취재를 종합하면, 박 씨의 실제 벤젠 노출 수준은 누구도 확인할 수 없었다.
2020년 1월 21일 인사혁신처 산하 공무원연금공단은 박 씨가 실제 사용한 제품조차 특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한의사협회에 의료감정을 의뢰했다. 실제 어떤 제품에 벤젠이 얼마나 들어 있었는지, 작업 과정에서 박 씨가 어느 정도의 벤젠에 노출됐는지를 확인할 자료가 없는 상태였다.
‘의료사안 감정 회신서’를 보면,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은 페인트와 신나에 벤젠이 함유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만약 함유되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불순물로 들어 있는 수준”이라며 실제 작업 중 고농도로 벤젠에 노출됐을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근거는 감정서에 제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의료감정원은 감정서에서 한계를 명시했다. 우리나라의 백혈병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은 벤젠에 0.5ppm 이상 농도로 6개월 이상 노출된 경우인데, “함정 정비 작업에서 벤젠 노출 수준을 측정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해당 기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결국 의료감정원이 내린 ‘불순물 수준’이라는 판단은 실제 노출 수준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린 셈이다.
그럼에도 인사혁신처는 이 의료감정을 근거로 박 씨의 백혈병과 공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 씨는 불복 절차로 공무원재해보상연금위원회에 심사청구를 했지만 이 역시 기각됐다. 그는 2021년 7월 행정소송을 결심하고 이학준 변호사를 찾아갔다.
이 변호사는 벤젠에 노출된 군인의 만성골수성백혈병을 직업성 암으로 인정받아낸 전력이 있었다. 마침 제주도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왜 특정하지 못했나
CML은 수년간 무증상 상태로 지내다가 우연히 혈액검사 등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박 씨 역시 가슴 답답함으로 심장 내과를 찾았다가 혈액검사를 통해 알게 됐다. 정확히 언제 발병했는지 특정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다만 박 씨가 낸 심사청구 이유서에 따르면 서울성모병원 담당의는 확진일 기준 6개월에서 1년 사이로 추정했다고 한다. 해당 기간은 박 씨가 3000톤급 함정에서 근무하고 있던 때다.

남부저널은 나라장터 등 공개 자료를 통해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해경에 납품된 페인트와 신너가 S페인트, J산업, P업체 제품인 점과, 저독성에나멜, 에나멜신나, 저독성우레탄, 우레탄신나, 저독성비닐, 비닐신나 등 실제 납품 품목과 수량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 씨조차 본인이 사용한 제품이 새로 입고된 제품인지, 함정 내 재고를 사용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확인할 수 없는 건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재판부가 사실조회를 통해 확인하려고 했지만, 해경은 박 씨가 실제 어떤 제품을 얼마나 사용했는지 보여줄 기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남부저널은 앞서 확인한 업체와 품목을 바탕으로 해당 제품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 공개도 요구해 봤지만, 해경은 이 자료 역시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해경 관계자는 “현재는 납품받을 때 MSDS를 받고 있지만 당시는 이를 요구하는 규정이 없어 실제로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조차 지금은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인사혁신처는 “원고(박 씨)가 벤젠 노출을 뒷받침할 자료를 못 냈다”며 불순물 정도의 수준으로는 상당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재판 내내 이어갔다. 이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공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고 그 인과관계는 이를 주장하는 측에서 입증하여야 한다’는 2003년 대법원 판례를 재판에 인용했다.
입증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1심 재판부(서울행정법원, 서경민 판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사혁신처 손을 들어줬다.
- 박 씨가 사용한 제품 속 벤젠 함유 여부를 확인할 객관적 자료가 없다는 점
- 안전보건공단의 2013년 ‘벤젠의 과거노출추정(JEM)’ 연구가 제시한 신나류 벤젠 함량 최솟값(0.001%)을 적용하면 “기준치(발병 당시 국내 기준은 0.5ppm)를 초과한 벤젠에 노출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
원고 측 감정의는 같은 연구의 최댓값(1.66%)을 근거로 기준치 이상 노출 가능성을 추정했지만 법원은 최솟값만 인용했다.

무력감에 빠진 박 씨에게 항소를 권유한 건 이학준 변호사였다. 더러 패소할 것이 분명한 사건임에도 돈을 벌기 위해 항소를 권유하는 변호사들도 있지만 이 변호사는 100% 승소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의뢰인에게 항소를 먼저 권유하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패소 후 가책과 자책은 온전히 본인 몫이기 때문이다.
“그건 경력이 쌓여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변호사가 항소를 권유한 건 기관이 자료를 보관하지 못한 책임을 힘없는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판단해서다.
“억울했다. 정부가 보유했어야 할 사용 제품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노동자가 입증 책임을 지고 패소하는 이 부조리한 구조가…CML은 유전병이 아니라 후천적 변이에 의한 질환이다. 박 씨 생활 습관을 보면 다른 위험요인이 없는 상황을 고려했을 때 다른 발병 원인을 찾기 어려워… 항소를 설득하긴 했지만 걱정도 컸다.”
변호사에게 사기를 당하는 것 아니냐는 주변 만류가 있었지만 박 씨는 이 변호사를 한 번 더 믿어보기로 했고, 2026년 1월 28일 2심 재판부는 1심 전부를 뒤집었다.
“원고가 청락 및 도색 작업에 사용한 제품의 종류와 유해물질의 함유 여부 등에 관한 자료를 해양경찰청 등에서 보유하고 있지 않아 그에 대하여 알 수 없다는 사정을 원고에게 불리하게 고려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2심 재판부(서울고등법원 제4-2행정부)판결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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